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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삼정의거

의거의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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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심창의 성장과
아나키즘 수용
일본에서의
항일 의열투쟁
중국에서의
의열투쟁
상해 육삼정 의거와
투옥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운 항일투사이자 평화통일 운동가인 원심창(元心昌, 1906년 12월 1일 ~ 1971년 7월 4일) 선생은 그동안 아나키스트이자 반공산주의자, 반정부 인사라는 이유로 남한과 북한 양쪽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원심창은 이회영과 신채호·류자명·박열 등 당대 아나키스트들이 그랬던 것처럼, 항일투쟁과 반공산주의운동을 위해 총과 폭탄 들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남북의 독재정권에 날선 비판을 하는 등 민주화운동에도 온몸을 바쳤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동족상잔 속에서도 그는 낙담하지 않고 대립과 반목의 현실을 바꿔나가기 위한 통일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원심창은 1906년 12월 1일 현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당시 충청남도 평택군 부용면) 안정리 175번지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원주(原州)이며 이명은 원훈(元勳)이다. 3형제 중 막내인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의협심이 강하였다고 한다. 9세 때인 1914년 3월 소년 원심창은 집에서 멀지 않은 읍내면 객사리에 있는 평택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4년만인 1918년 2월에 졸업하였다. 학업을 마친 원심창은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면서 생활을 하였다.

소년 원심창에게 민족의식에 눈 뜨게 한 사건은 무엇보다 조선 전국과 세계를 뒤흔든 3·1만세운동이었다. 평택군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9일 계두봉을 시작으로 4월 10일까지 전 군내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 중 부용면 주민들은 4월 1일 밤 부용산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안성천 군문교에 이어 평택역으로 모여들었다. 이날 평택역 만세운동은 3천여 명이 참가할 정도로 가장 규모가 컸던 시위였다. 원심창재판판결문에 의하면 당시 14세 소년인 원심창도 이날 참여하였다. 이 때의 경험은 판결문을 비롯해 각종 약력소개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가 평생 민족운동에 투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원심창은 1920년 3월 서울의 중동학교(中東學校, 현 서울시 강남구 일원동 중동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중동학교는 1907년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최규동(崔奎東)이 창설한 학교로서, 일본어와 중국어·영어 등을 비롯해 산수와 부기 등 신식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로 유명했다. 이 곳에서 원심창은 속성과를 2년만에 졸업하였다.

원심창은 배움에 대한 더 큰 꿈과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을 품고 1923년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인 도쿄(東京)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이어 곧 니혼(日本)대학 전문부 사회과에 입학하였다. 도쿄 중심가인 간다(神田)구 시내에 위치한 니혼대학은 메이지(明治)대학·주오(中央)대학 등 당시 민주주의운동이 꽃피던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의 영향을 받아 서구 민주정치와 신사상을 받아들이려는 진보적 학풍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원심창은 학비를 조달하지 못해 학업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2년이 못되어 대학을 자퇴하였다. 이때부터 자유노동자로 가까스로 생활을 이어갔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와중에도 “여가에 도서관을 이용하며 독서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이 무렵 신사상에 관심을 갖고 현대 아나키즘 사상을 기초한 크로포트킨(1842~1921)의 『상호부조론』과 『빵의 약취』를 읽고, 일본의 사상가인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1885~1923)의 저서를 탐독하며 아나키즘 사상에 공감하였다. 또 재일한인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우회의 박열(朴烈, 1902~1971)과도 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