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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을 위해 통일을 위해

민족을 위해 통일을 위해 원심창은 1906년 12월1일,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안정리 175번지에서 출생 1918년 평택공립보통학교(현,성동초등학교 2회)를 졸업하고, 1919년 3·1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1922년 서울의중동학교를 졸업후 ,1923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3년 일본(니혼)대학 사회과 전문부에 입학 하였다.1924년부터 흑우회에 가담하여 주도적인 항일 운동을 하였다. 관동 대지진때 조선인학살을 성토하는 흑색신문을 발행하여 일제의 야만적인 행동을 알리는 운동을하였다. 1929 년 4월 친일파 자제 들의 모임인 상애회를 급습하여 이들의 비민족적인 행태를 규탄하다가 검거되어 징역 3월의 옥고를 겪으셨다. 더 이상의 일본 에서의 활동을 접고, 1931년 북경으로 건너갔다. 같은해4월 이회영(李會榮) 류자명,백정기 등과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남화한인 청년 연맹에 가담, 연맹의 총서무를 담당 하였다. 1932년 11월 천진(天津) 일본영사관 과 일본군 병사(兵舍)를 폭파에 참가 하는등 대일 투쟁을 전개 하였다. 1933년 3월 남화한인청년 연맹단 들과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有吉明)를 폭살하기로 계획하고, 백정기.이강훈 등과 중국상하이 에 있는 육삼정(六三亭)부근에서 대기하던중 일본첩자의 밀고로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일본 나가사키(長崎)지방 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을하다가(12년7개월) 광복을 맞이하였고, 1945년 10월10일 맥아더의 정치범 석방으로 감옥에서 나올수있었다.해방후에는 국내에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하였고,1946년 일본으로돌아가 재일 한인사회의 안정을위해 진력 했다. 같은해,재일조선거류민단을 창설하고 초대사무총장과 11대 12대 중앙단장을 역임하였으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재일학도의용군 모집총책으로 남한의 공산화 저지에 힘썼고, 전재원호 사업위원회를 구성하여 전쟁의 참화로 인한 부상자를 도왔다.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에 들어가자 남북촉진 협의회 를 최초로 결성하였으며, 1959년 우리 민족지인 조선신문 (현,통일일보)를 창간해 대표 및 상임고문 으로 활동하였다. 1965년 한국민족 자족통일동맹 일본본부를 결성해 대표위원 으로 선출되어 통일운동을 계속 하였다. 1971년 7월 4일 일본에서 오랜 수감생활로 얻은 병으로 영면 하였으며, 재일본 한국인 사회장으로 장례위원회를 설치하여 영결식을 거행 하였으며, 동시에 의사(義士) 칭호 추존을 받았다. 이에,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 (현,독립장) 에 추서 되었다.

일제 제국주의를 폭로한
육삼정 의거 주역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
무정부주의 운동으로 독립투쟁

광복 이후에도 일본서
민족 해방을 위해 노력

원심창과 육삼정 의거


1933년 3 월17일 상하이 중국 고급 식당 육삼정에서 주중 일본공사 유길명(아리요시 아키라)가 중국 측과 밀담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백정기,이강훈 동지와 일본공사를 폭살할려고 수류탄.폭탄.권총 등으로 무장하고 현장을급습 하였으나, 이미 밀정으로부터 정보를받은 경찰들에 의해 피체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대륙침략 음모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원심창이 속한 “흑색공포단”은 이전부터 아리요시 공사를 처단 하고자 했던 것이다. 원심창이 세운 처단 계획은 다음과 같다.

  1. ① 1932년 7월 이회영(李會榮) 선생을 밀고한 밀정 연충렬, 이규서 를 처형
  2. ② 1932년12월 텐진 일본 영사관저 및 일본군 병영폭파 가담
  3. ③ 일본 정금은행 (요코하마 상해지점) 은행폭파 시도-
  4. ④ 일본 주중공사 폭살 계획을 거행하던중 밀정에 의해 피체ㅡ

해외 3대의거 ㅡ 이봉창 의사 의거, 윤봉길의사의거, 육삼정의거